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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40] 미국 경제발전에 도움 될것이라는 기대로 민주당원임에도 불구하고 한미FTA 지지

-한미 FTA 나는 왜 찬성하는가 한국은 전쟁을 겪은 후 폐허더미 속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냈다. 북한보다도 국민소득이 낮았던 나라가 지금은 세계 11번째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했다. 삼성의 첨단산업은 이미 세계 1위에 올라 있고 현대자동차의 제네시스는 유럽의 BMW나 렉서스를 능가하는 최우수 승용차로 평가받고 있다. 휴대폰 개발은 미국보다 4년 정도 앞서가고 있다. 나는 이러한 한국의 잠재력에 대해 큰 확신을 갖고 있다. 정치 면에서 보더라도 한국의 잠재력은 대단하다. 미국은 민주주의 역사가 230년을 넘어선 나라다. 한국은 군사정권을 끌어내리고 민주화를 이룬 역사가 20년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한국의 민주화 발전 과정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빠르고 광범위하다. 내가 한국을 떠나올 때의 그 서슬 퍼렇던 유신 시절에 비하면 지금의 인권 상황 정치적인 자유 언론의 자유는 하늘과 땅 차이가 아닌가. 물론 아직도 정당 공천 문제 등 개선되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지만 선거 때마다 새 정치인들이 대거 수혈되면서 미국보다도 더 빠르게 정치적인 혁신을 이루어 나가고 있다. 작은 나라에서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 한국인들은 세계 어디에 가도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각 분야에서 한국의 발전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한국인이 자랑하는 특유의 창조성과 추진력에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인의 교육열을 언급하면서 미국 학생들도 한국 학생들처럼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말할 정도가 아닌가. 나는 그런 한국이 자랑스럽고 또한 내가 그 피를 이어받았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느낀다. 나는 미국 민주당원이다. 그러나 미국의 지방자치 선거에서는 당적을 표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공화당 민주당을 따지지 않고 어바인 사회를 위해서라면 누구와도 힘을 합쳐 일한다. 시의원이 되기 전에는 한미민주당협회 회장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기 때문에 내가 민주당 당원이라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한국의 입장을 거들어 민주당이 반대하는 한미 FTA 통과를 위해 한인단체들의 연합 모임에 참여하고 비준 촉구 서한에 서명해서 연방 의회에 보내기도 했다. 나는 한미 FTA가 조속히 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국으로서도 지금의 경제 난국을 헤쳐나가는 데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한미 FTA 통과 지지 대열에 참가한 것은 다름 아니라 내가 코리안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미국의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좋은 촉매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한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고 미약하나마 한국 정부를 돕는 일이며 두 나라의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윈윈 전략'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두 나라가 당장 자신들의 이익만 생각하기보다는 최적의 공익을 위해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양보하고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앞으로 나의 정치적 행보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나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주어진 일에 충실하다 보면 새로운 길이 보이리라. 오직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다. 그분이 나를 지금까지 준비시켜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믿는다. 내가 어떠한 길을 가든지 간에 변치 않을 마음이 있다. 그것은 미국 한인사회를 위해 나의 조국 한국을 위해 내가 작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힘닿는 데까지 노력할 것이란 각오다.〈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09-11-12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39] 서키시티 근무할때 한국 모르는 고객들엔 품질 좋은 골드스타 TV 만드는 나라"설명

-골드스타가 도대체 뭐야? 한국은 나를 키워주고 꿈을 길러준 곳이다. 추억과 우정이 살아 있는 곳이고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묻혀 계신 곳이며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다. 이제는 미국에 산 기간이 한국에서 산 기간보다 점점 더 길어져 가고 있지만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해 본 적은 없다. 2 3년에 한 번씩 방문할 때 마다 눈부시게 발전하는 한국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비록 몸은 미국에 있지만 모국에 대한 뜨거운 애정은 식기는커녕 오히려 더 새로워진다. 내가 미국에 오자마자 취직한 서킷시티에서 햇병아리 시절을 보내던 1978년쯤의 일이다. 당시 한국 최고의 전자제품 회사인 금성사가 '골드스타'라는 브랜드로 TV를 미국에 처음으로 수출했고 우리 회사는 이 제품을 납품받아 막 판매를 시작할 때였다. 세일즈맨과 간부들이 모두 참가한 판매 전략 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골드스타 TV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골드스타? 골드스타가 도대체 뭐야." 한 매니저가 골드스타란 이름을 몇 차례 반복하자 짓궂은 세일즈맨들이 가소롭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키득거렸다. 이름부터가 웃긴다는 것이다. 당시 한국의 전자제품이라는 게 지금으로 치면 동남아 어느 나라 제품 정도의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유일한 아시아계 직원이었던 나는 그들이 한국의 대표 기업 제품을 거론하면서 조롱하는 듯한 반응에 무척 기분이 상했다. 부아가 치밀어오른 나는 손을 번쩍 들어 발언권을 요구했다. 그때 내가 자제심을 보이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러분이 다 알다시피 한국에서 온 사람입니다. 나는 골드스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회사는 한국에서 가장 품질 좋은 전자제품을 만드는 회사이고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회사입니다. 한국에서는 골드스타 제품이라면 누구나 신뢰하고 있습니다. 나도 그 회사 제품을 애용했는데 품질에서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신뢰해서 함께 일하는 것처럼 골드스타에 대해 확신을 갖고 팔아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애원하듯 강권하듯 동료들에게 골드스타의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한국 전자제품이 미국에 수출되어 팔린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로서는 감격할 일인데 동료 직원들이 이를 조롱하듯 받아들이니 서운하기 그지없었다. 직원들은 회의가 끝난 뒤 나에게 다가와 "수키 미안하다. 너를 믿고 우리가 열심히 팔아볼 테니 걱정하지 마라"며 위로했다. 한국을 떠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한국에 있을 때는 그다지 의식하지 못했던 내 몸속의 '코리아 유전자'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해외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이래서 생긴 것일까. 세일즈맨들은 나를 의식해서인지 골드스타 제품을 열심히 팔았다. 가격도 싸고 품질도 뒤지지 않는다는 말에 고객들은 서서히 골드스타라는 이름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삼성 12인치 흑백 TV는 금성 TV보다 조금 늦게 우리 회사에 들어왔다. 다행히 먼저 금성 제품이 소개가 되어서 그런지 삼성은 그런대로 잘 팔렸다. 물론 그 당시에는 두 제품이 가장 싸게 팔렸다. 삼성 전자레인지도 그때쯤 들어왔다. 당시 일제 소니 제품은 가장 비쌌지만 품질이 좋아 소비자가 선호하는 제품이었다. 초창기에 미국 시장에서 푸대접받던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들이 이제는 세계 최고의 제품으로 우뚝 선 모습을 보면 정말 자랑스럽고 감회가 새롭다. 눈에 금방 띄는 아시아계 직원이었던 나는 고객들로부터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는 질문을 여러 차례 들었다. 코리아에서 왔다고 하면 그런 나라가 어디 있냐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화를 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고객들을 만나면 "삼성이나 골드스타 같은 좋은 TV를 만드는 나라가 바로 코리아다 코리아는 5000년 역사와 고유 문자를 갖고 있는 문화 국가"라고 장황하게 설명했다. 사실 대한민국을 자랑하려 해도 '유구한 역사' 말고는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시절이었으니까. 〈계속> 글=올림 출판사

2009-11-11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38] 한인신문보고 한국 드라마 즐겨보는 나에게 아내는 미국 뉴스에 신경쓰라고 종종 충고

아내와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아무런 확신을 줄 수가 없었다. 그저 미국에 가서 열심히 하면 잘될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밖에 할 수가 없었다. 무슨 취직자리가 보장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큰돈을 싸들고 가서 번듯한 가게를 차릴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가서 몸으로 부딪치면서 살아보자고 했던 나를 믿고 따라와주었고 오늘날의 내가 있기까지 무던히도 고생하면서 인고의 세월을 버텨준 아내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릿해진다. 아마도 아내는 나를 신뢰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준비된 것도 가진 것도 없는 나를 만나 그런 도박을 했을까. 함께 희망을 가꾸고 나를 믿고 지금까지 동행해 준 아내 그녀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미국에 가면 우선 공부를 할 예정이었다. 공부를 하면서 영어도 더 익히고 미국 생활에 적응한 다음에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우선은 형이 살고 있는 샌프란시스코로 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처음이니 형의 도움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 이민자의 성공 스토리를 들으면 다들 무일푼으로 건너가 아메리칸 드림의 신화를 일구었다고 하는데 나는 어쩐 일인지 자신이 점점 없어졌다. 낯선 땅에서 부딪치고 헤맬 생각을 하니 차라리 마음 편한 한국에서 취직해서 사는 게 속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무턱대고 이민 결정을 내린 자신이 너무 경솔하지 않았나 후회한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뒤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마음의 갈등으로 힘들 때 18살 때부터 인생을 설계하고 33살에 회사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세운 원교 형이 생각났다. '그래 지금부터 내 인생을 다시 만드는 거다. 지금까지의 강석희는 잊는다. 미국이라는 허허벌판 도화지에 내 인생의 그림을 새로 그리는 거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다. 나는 이미 시작을 했으니 반은 이룬 것 아닌가. 새로운 내 인생의 설계도는 미국에서 그리자.' 복잡한 마음은 정리되었다. 아내는 "당신처럼 뭐든지 열심히 하는 사람이면 미국에서도 못 이룰 것이 없어요" 하며 힘을 실어주었다. 1977년 6월 11일. 부모님의 이슬 맺힌 눈동자를 애써 외면하면서 나는 공항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미래는 불확실의 세계였다. 그때 내가 어바인 시장이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아내는 나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았을까? 참 인생은 생각할수록 오묘한 드라마라는 생각이 든다. ◇내 핏속을 흐르는 코리아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 한국에서 초.중.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병장으로 국방의 의무를 마친 다음 24살에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하지만 솔직히 영어보다 한국어가 더 편하고 햄버거도 좋아하지만 된장과 김치찌개도 아주 좋아한다. 미국 신문도 물론 보지만 한인 신문은 빠짐없이 읽고 저녁에 쉴 때는 가끔 한국 드라마도 즐긴다. 아내는 좀 더 '미국화'되어선 지 항상 미국 언론에 귀 기울이며 중요한 뉴스를 매일 모니터한다. 그래서 아내를 통해서 미국 소식을 듣는 때도 많다. 아내는 나에게 쓴소리도 잘한다. 집에서도 가장 신랄한 비판자다. 이제 미국에서 주요 도시의 시장이 되었으니 미국 뉴스를 더 많이 보고 들으라고 충고하기도 하는데 나는 여전히 한국적인 내가 좋다. 물론 미국 뉴스도 깊은 관심을 갖고 모니터하지만 한인사회에 관한 뉴스에 항상 신경을 쓴다. 내가 15년간 근무한 전자제품 유통 회사 서킷시티에서의 세일즈맨 매니저 생활을 청산하고 한인사회에서 각종 사회 활동을 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인 한국에 대한 나의 애정은 더욱 커진 것 같다. 나의 앞날이 어떻게 펼쳐질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강석희는 영원한 한국인'이라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계속〉 글= 올림 출판사

2009-11-10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37] 미국 가기전 장가 가라는 어머니 성화에 소개 받은지 3개월만에 약혼·결혼 뚝딱

중학교에 진학해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미국은 좀 더 친밀한 나라가 되었고 고등학교 시절부터는 언젠가는 미국에 가겠다는 마음을 먹기 시작했다. 존 F. 케네디는 나의 표상이었다. 원대한 비전으로 미국을 하나로 통합하고 멋진 연설과 넘치는 패기로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던 케네디의 전기를 읽으면서 나는 케네디처럼 멋진 웅변가가 되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래 미국에서 미국인들과 경쟁해서 이기려면 기본적인 무기부터 갈고 닦아야지. 영어는 가장 필요한 무기가 아닌가. 그들보다 잘할 수는 없겠지만 영어도 못한다고 업신여김은 받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영어에 대한 오기는 점점 커졌다. 영어를 하지 못하면 출발선부터 뒤처지는데 미국 생활에서 어떻게 성공하겠는가. 나는 이를 악물고 영어에 매달렸다. ◇새로운 삶 넓은 무대를 찾아서 1970년대 초반은 먹고 살기 위한 '헝그리 이민'이 대부분이던 시기였다. 가난한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새 삶을 선택한 사람들의 성공 스토리는 한국 언론이 놓치지 않는 메뉴였다. 대학을 마치면 바로 미국에 가겠다고 결심을 굳히고 있던 시절 한인동포들의 성공담은 나의 가슴을 더욱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몇 백 달러를 들고 이민을 가서 열심히 노력한 끝에 백만장자가 되었다는 성공담을 전하는 동포들은 한결같이 '미국은 기회의 땅이고 아메리칸 드림은 도전하는 사람의 것'이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말로만 듣던 '아메리칸 드림'은 허상이 아니고 도전하면 손에 쥘 수 있는 구체적인 무엇이란 확신이 들었다. '저 곳이 나의 무대다. 나도 저 넓은 무대에서 마음껏 실력을 발휘하리라. 나도 대한민국의 아들로서 부끄럽지 않은 성공한 이민자의 모습으로 조국에 보답하리라.' 제대한 뒤 복학해 나머지 2년의 대학 생활을 마치고 졸업한 나는 미국행 준비를 서둘렀다. 형이 일찌감치 형제 초청 이민을 신청해 비자는 받아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변변한 여자 친구 하나도 못 만들 정도로 주변머리 없는 나를 걱정한 부모님이 미국에 가면 여자를 만나기 힘드니 한국에서 반려자를 만나서 함께 미국에 가라고 하셨다. 겨우 스물넷이었던 나는 미국에 가서 자리를 잡은 다음에 결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에 간다는 것만 정해졌을 뿐 먹고 살 방도가 세워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누가 나에게 시집을 오려 하겠느냐고 부모님을 설득했다. 그러나 부모님은 장가도 안 간 아들을 머나먼 타국에 보내는 것이 영 안쓰럽고 불안하신 모양이었다. 그때 친척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1977년 1월 11일이었다. 나보다 2살 어린 고대 후배였다. 얼굴이 곱고 지성미가 흘렀다. 고대 후배란 점도 마음에 끌렸다. 당시 고대 여학생들은 실력이 좋았다. 여학생 숫자가 워낙 적은 데다 대부분 공부에만 전념하는 학생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대 여학생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3월 2일 약혼 4월 28일 결혼. 그야말로 석 달 동안에 졸업 결혼이라는 인생의 큰 과정을 연달아 치른 것이다. 첫 선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아 지금까지 내 곁을 지켜주고 있는 여자가 바로 나의 소중한 아내 최원희다. 나는 이 부분에서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22살의 어린 나이에 아무것도 없던 나를 믿고 시집을 왔고 지금껏 가정을 지켜주고 헌형과 지현 두 아이를 훌륭하게 키워주었으니 말이다. 아들 헌형이는 UC샌디에이고를 졸업하고 존슨앤드존슨의 선임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현재는 회사 전액 장학금으로 USC대학의 MBA코스를 밟고 있다. 딸 지현이는 UCLA에서 언론학을 전공한 뒤 UC버클리법대를 졸업하고 지금은 미국 최대 법률회사인 레삼앤드왓킨스에서 형사법 전문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09-11-09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36] 초등학교때 훌쩍 미국으로 이민 떠난 큰형, 가끔 보내준 미국 물건은 주변의 자랑거리

원교 형과의 만남은 아무런 그림이 없던 내 인생을 뒤흔들어놓았다. 대학 2학년을 마치도록 인생의 로드맵도 없이 방황하고 있는 나의 자화상을 확인하고는 마음이 급해졌다. 형은 철없이 우왕좌왕하던 내 인생에 따끔한 침을 놓았고 나는 어렴풋하지만 서서히 내 삶의 모습을 그려보는 연습을 하게 되었다. 형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톨릭 신앙이 형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앙이라는 것이 이렇게 사람으로 하여금 한 차원 높은 생각을 품게 하는구나'라는 생각에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형을 따라 명동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가본 성당의 분위기는 엄숙하고 생경했지만 종교를 통해서 내가 더 멋진 모습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내친 김에 영세를 받고 싶었는데 영세를 받으려면 일정한 교리 학습 과정을 밟아야 했다. 그러나 군 입대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아 영세를 받지 못했다. 원교 형은 몇 년 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형의 진실된 삶과 확고한 인생관을 배우며 살고 있다. 내가 자라난 종로 5가 쪽에 종로성당이 있었다. 그 성당에 안젤라라는 세례명을 가진 한 여학생이 다녔다. 같은 학교 후배였다. 키는 자그마했는데 눈이 참 맑고 그야말로 천사 같았다. 말없이 고운 모습으로 예배를 보는 그녀를 보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안젤라에게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성스러움이 풍겼다. 나는 천사의 기운을 뿜어내는 그녀를 이성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가당치 않다고 생각했다. 몇 개월 동안 흘깃흘깃 훔쳐보는 것이 전부였다. 원래 숫기가 없기도 했지만 그녀만 나타나면 나는 왠지 내 자신이 한없이 작아 보였다. 그것이 첫사랑이었을까. 참 싱거운 짝사랑이었다. 나는 마음을 접고 논산훈련소로 향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초등학교 4학년 코흘리개 시절 나보다 12살 위였던 큰형은 훌쩍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 살려고 갔다는 말을 들었을 뿐 워낙 나이 차이가 많이 났기 때문에 자세한 배경은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형이 미국으로 떠난 다음부터 나는 마음 한구석에 '미국이란 어떤 나라인가' 늘 궁금증을 품게 되었고 친구들한테는 미국에 형이 산다고 자랑하곤 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살던 형은 가끔 부모님께 편지를 보내왔다. 녹음테이프에 육성을 담아 소포로 보내오기도 하고 미국 생활에 대한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들려주기도 했다. 자동차가 우리네 신발처럼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라는 것 고속도로가 여기저기 뻥뻥 뚫려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지 달려갈 수 있다는 것 땅이 넓고 공원이 많아서 놀러 갈 곳이 무척 많다는 것 한국 사람들은 열심히 일해서 대부분 잘 산다는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고생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우리 형제들은 형의 미국 생활 이야기를 부모님을 통해 전해 듣곤 했다. 형으로부터 연락을 받는 날이면 멀리 떠나보낸 자식 생각에 어머니의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지만 나는 어린 마음에 풍선이 부풀어오르는 듯한 대리 만족을 느끼곤 했다. 가끔은 형이 미제 물건을 보내주기도 했다. 덕분에 한국에서는 부잣집 아이들이나 입는 비싼 미제 브랜드 옷도 가끔 입을 수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형이 보내주는 미제 커피나 비타민 같은 건강 식품을 주위 친구들에게 자랑하시는 게 큰 기쁨이었다. 그 시절은 미국 이민이 크게 부러움을 사던 때였다. 친구들은 나에게 "너도 미국 갈 거니? 형이 초청 안 해?" 하면서 마치 내가 언젠가는 미국에 갈 것으로 예상하는 듯했다. 나는 미국에 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형으로 인해 미국이라는 나라의 이미지가 내 안으로 자꾸 파고 들어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친구들이 나에게 언젠가는 미국에 갈 수 있겠다는 암시를 줄 때마다 미국은 저 멀리 상상 속의 나라가 아니라 형이 살고 있는 것처럼 나도 갈 수 있는 나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09-11-05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33] 나를 일으켜 세운 스승의 말씀 "절대로 적당주의에 안주 말라"

잊을 수 없는 얼굴들 고등학교 시절 지리 과목을 담당하셨던 이광섭 선생님은 나에게 많은 정신적 가르침을 주신 분이다. 전쟁 중 월남하신 선생님은 항상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적당하게 살면 안 된다. 적당주의로 사는 인생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후회 없는 인생을 살고 싶으면 최선을 다해라. 인생의 의미는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데 있는 것이다. 성공은 결코 적당주의와 손잡지 않는다." 나에게는 회초리 같은 말씀이었다. 그래 무엇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으면 끝장을 본다는 각오로 덤벼들어야지 대충대충 해서는 죽도 밥도 안 된다 내가 그동안 무엇 하나 제대로 파고들어 본 적이 있었나 반성하게 되었다. 겨우 영어에 취미를 붙여 중학교 때부터 영어를 잘한다는 말은 듣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그저 영어에 흥미가 있어서 열심히 했을 뿐이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그래 영어 하나라도 최고가 되자" 하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파인트리 클럽을 찾아 본격적인 회화 공부를 하게 된 것도 선생님이 말씀하신 적당주의에 대한 반성이었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동안 해오던 대로 해오던 수준만큼만 노력하면서 더 많은 것을 얻기를 바란다. 인풋(input)은 그대로 두면서 아웃풋(output)이 늘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것은 욕심일 뿐이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 거저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항상 남들보다 더 많이 일하고 더 열심히 뛰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뜻하지 않은 결과가 나오기 시작한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 되었다. 지금도 가끔 나태해지려 할 때마다 선생님의 말씀이 나를 일으켜세운다. "절대로 적당주의에 안주하지 말라. 적당히 하면 적당한 결과를 얻을 것이요 네 인생도 있으나마나 한 적당한 인생으로 끝날 것이다." 소중한 나의 친구들 나는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긴다. 한번 인연을 맺으면 그 끈이 끊어지지 않도록 나름대로 애를 쓰는 편이다. 몸은 비록 미국에 있지만 지금도 나는 연락이 끊긴 한국의 친구를 수소문해서 다시 만나고 옛 친구들과 연결시켜 주는 역할도 종종 하는 편이다. 고3 시절 같은 반이었던 이종인은 나의 정신적 보디가드였던 친구다. 창신동에 살았던 종인은 괴짜로 통했다. 영어 실력이 탁월해 나와 죽이 잘 맞았다. 노력파였던 종인은 한문에도 조예가 깊어 스스로 한시를 지어 줄줄 외우는 또래 아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아이였다. 그러나 수학에는 통 관심이 없었다. 수학 공부는 전혀 하지 않으면서도 모의고사를 보면 항상 전교 5등 이내에 들었다. 친구들은 종인이가 수학만 조금 더 공부하면 전국 1등도 문제없을 거라고 했다. 늘 어울려 다녔지만 종인에게서 나는 가끔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상식이 무척이나 풍부해서 나로서는 거의 처음 듣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종인은 나와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아직 그런 것도 모르냐며 핀잔을 주고 약을 바짝 올렸다. 자존심이 강했던 나는 종인이 해박한 지식으로 나를 기죽이거나 놀릴 때는 삐쳐서 이야기도 하지 않고 골을 내곤 했다. 그때 종인은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던 것 같다. 내가 삐쳐서 말을 하지 않으면 슬며시 다가와서 집에 같이 가자면서 나를 토닥거렸다. 종인은 성적이 좋아서 다른 대학도 충분히 갈 수 있는 실력이었지만 "나는 석희 따라서 고려대 간다"면서 고대 영문과에 진학했다. 언제나 나를 배려해 주고 끝까지 우정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참 좋은 친구였다. 종인은 호기심이 많아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지적인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를 보면서 나 자신의 적당주의를 나무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식이나 성격이나 여러 면에서 부족했던 나를 친구로서 포기하지 않고 항상 곁에서 동행하고자 했던 종인은 도전 정신이 부족했던 나에게 큰 자극이 되었고 내가 자신감을 키워가는 데 큰 힘이 되어주었다. 글.사진=올림 출판사

2009-11-02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32] 내가 영어 잘해 주류 유권자 설득 했겠나? 쉬운 단어 짧은 문장으로도 충분히 통해

-영어 학습에 비법이 있을까? 나는 영어 단어와 문장을 많이 외우고 익숙해질 때까지 수십 번 반복해서 연습하는 편이다. 중학교 때부터 그렇게 공부했다. 무조건 중얼중얼 외워서 그것이 자연스럽게 말로 나올 때까지 끊임없이 반복했다. 중요한 문장은 노트에 써 가지고 다니면서 장소에 관계없이 외웠다. 중학교 시절이었나 보다. 콩나물시루 같은 만원 버스에 올랐는데 어디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초보 아나운서인지 아나운서 시험을 보려는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방송 뉴스를 진행하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아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익숙해질 때까지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목소리 톤을 바꿔가면서 "다음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며 연습하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한 인간의 투철한 도전 정신 주변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 배포 그리고 완벽을 향한 치열한 열정을 본 것이다. 나도 버스에서 본 그 사람처럼 틈만 나면 영어 단어를 외우고 팝송 가사를 읊었다. 방 안에서 내가 중얼대는 소리를 듣고 식구들이 "뭐라고? 방금 뭐라 그랬어?"라고 물었다가 황당해한 적도 많았다. 지금도 연설이나 의제에 관한 토론을 준비할 때면 할 말을 써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연습한다. 아내가 자기를 불렀나 싶어 내 방에 들어왔다가 피식 웃고 다시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이렇게 반복해서 외우면 그것이 점점 내 몸에 익숙해진다. 내가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영어 문장은 대부분 외운 것이 바탕이 되어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입에서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것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쉬운 말로 명확하게! 어차피 내 영어는 공부를 통해 익힌 교과서적인 영어라기보다는 세일즈맨으로 일하며 익힌 생활 영어에 가깝다. 우리가 영어를 쓰는 목적이 고급 영어를 구사해서 상대방으로부터 찬사를 받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원활한 의사소통에 있다면 구태여 어려운 표현을 구사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쉬운 영어로 명확하게 의사 전달만 하면 된다. 내가 선거 유세를 하면서 미국인들을 잘 설득할 수 있었던 것도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기 때문이 아니라 쉽고 명쾌한 단어와 짧은 문장으로 그들의 귀에 나의 메시지를 쏙쏙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어려운 단어를 힘들게 외워봤자 실생활에서 써먹을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지금은 한국의 영어 교육이 많이 달라졌다는 말을 듣지만 옛날 우리가 대학 입시를 위해서 매달렸던 수많은 문법 책이 실제로 영어를 구사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한국에 사는 세계 각국의 여성들이 출연해서 한국어로 수다를 떠는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한국에 온 지 6개월 또는 1년이 되었다는데 기가 막힐 정도로 한국말을 잘했다. 사실 그들이 구사할 수 있는 한국어 어휘가 얼마나 되겠는가. 설사 문법에 맞지 않는 말을 하더라도 우리가 못 알아듣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문법이 좀 틀리거나 다소 부적절한 단어를 쓰면 어떤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용기만 갖추면 된다. 영어를 잘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는 바로 자신감 배짱의 차이다.〈계속〉 글.사진=올림출판사

2009-10-29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31] 경관이 총 잡으며 "건물에서 뭐했나" 질문에 겁에 질려 한 말이 한심하게 "아이 돈트 노우"

- 그놈의 영어 때문에 영어 때문에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았다. 첫 직장에 처음 출근하던 날이었다. 고속도로에서 빠져나가야 할 때가 다 되었는데 차가 꽉 막혀 오도 가도 못하게 된 것이다. 첫날부터 지각할까 봐 안절부절 못하던 중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가만 보니 중간 차선이 텅 비어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이게 웬 떡이냐 싶은 마음에 얼른 중간 차선으로 달렸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 오토바이가 나타나더니 "Pull over!(차를 한쪽으로 세우시오)"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마치 무슨 죄를 지은 것 같은 느낌에 겁이 덜컥 나 경찰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솔직히 'pull over'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경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내가 그냥 차를 몰고 가자 경찰이 내 차에 바싹 다가와 차를 옆으로 대라고 손짓하는 게 아닌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차를 길옆에 세우고 경찰의 처분(?)을 기다렸다. 그런데 5분이 지나도 경찰이 오지 않았다. 그냥 갈까 하다가 혹시라도 지시 불응으로 간주돼 처벌을 받을까 봐 계속 기다렸는데 2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나는 경찰이 다른 바쁜 일이 있어서 나를 포기했나 보다 생각하고 자리를 떠났다. 물론 30분 가량 지각했다. 매니저와 동료들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걱정스레 물었다. 사정을 설명했더니 직원들이 일제히 박장대소했다. "수키 너 그 차선이 왜 비어 있었는지 아니?" 하고 묻기에 모른다고 대답했더니 "미국에서는 마지막 가는 분에 대한 예의의 표시로 장례 행렬이 지나갈 때 절대로 운구차를 가로질러서 가지 않는 거야"라고 설명해 주었다. 미국 관습을 몰라서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내가 취직하고 나서 아내도 잠깐 회사에 다닐 때의 일이다. 아내는 야간 근무를 하기 때문에 밤 12시쯤 일이 끝났다. 차가 한 대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는 매일 아내를 데리러 가야 했다. 하루는 평소처럼 자정이 넘은 시간에 아내를 차에 태워 나오는데 갑자기 앞에서 불빛이 환해지더니 경찰이 우리 차를 세웠다. 원래 미국에서는 운전을 하다가 경찰에 적발되면 차에서 나오지 말고 운전대를 잡고서 경찰의 지시에 순서대로 응해야 한다. 그런데 당시 그런 행동 수칙을 알 리 만무했던 내가 차에서 내리자 경찰은 권총이 있는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아마 "당신 그 건물에서 뭐 했어?"라고 물었던 것 같은데 워낙 겁에 질려 있었던 터라 경찰이 하는 말이 한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이 돈트 노우"라고 대답했다. 그 건물에서 무슨 볼일을 보고 나오느냐고 물었는데 내가 모른다고 말했으니 경찰이 기가 찰 법도 했다. 경찰이 신경질조로 "모른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라고 되물었다. 그제야 겨우 알아듣고 아내를 차로 픽업해서 나오는 길이라고 이야기했다. 겁에 질린 내 모습이 딱해 보였는지 "이곳은 새로 공사를 하는 지역인데 공사 현장에서 여러 번 도난 사고가 있어서 수상한 사람들을 잡는 중이었다"고 경찰이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매니저로 일하던 시절에는 익숙지 않은 발음 때문에 종종 실수를 했다. 영어의 발음은 때로는 상상을 초월한다. 예를 들어 'San Jose'라는 도시가 있다. 한국의 표기법으로는 새너제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샌호세'로 발음한다. 또 'Duarte'라는 도시 이름이 있다. 이것은 '듀얼트'가 아니라 '듀아리'라고 발음한다. 미국에서는 우범자들이 벽에 페인트로 낙서를 많이 하는데 그것을 '그래피티(graffiti)'라고 한다. 나는 이 단어의 액센트가 첫 번째 음절에 있는 줄 알고 직원들 앞에서 '래'에 액센트를 주어 '그래피티'라고 발음했다. 회의장에 폭소가 터졌다. 알고 보니 '피'에 액센트가 있어서 '그러피티'라고 발음해야 하는 것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2009-10-28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30] 영어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나는 이민 1세···연설때 뭔가 불편하면 진땀빼는 경우 많아

-영어가 뭐길래 미주 한인들의 영어 실력은 대개 이민 시기에 따라 구분된다. 1.5세들은 한국어도 잘하고 영어로 미국인들과 대화하는 데도 별로 어려움이 없다. 미국에서 태어난 2세들이야 당연히 미국인과 동등한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지만 대체로 한국어가 서툰 게 흠이다. 한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온 이민 1세 중에도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어느 정도 노력을 했느냐에 따라서 영어 실력은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어 LA 코리아타운 같은 곳에 살면서 주로 한인을 대상으로 사업하는 사람 가운데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드물다. 영어를 못해도 특별히 불편한 것이 없으니 공부할 필요성을 못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미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생활 영어를 터득했다. 미국 시스템 안에서 일반 대중과 함께 일하며 배웠으니 실용적인 영어를 배웠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나에게 영어를 어떻게 그렇게 잘하느냐고 하지만 솔직히 과찬이다. 나는 그 정도로 내 영어 실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평균적인 한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영어 클럽에서 회화 공부를 제법 하고서 미국에 왔고 미국에 오자마자 한인사회가 아닌 미국 직장에서 미국의 전통적인 세일즈 기법을 배우고 고객과 함께 호흡하면서 15년간 근무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영어 강박증'부터 버려라 중학교 시절부터 특별한 관심을 갖고 남들보다 좀 더 공부를 했다고 친다면 영어와 인연을 맺은 지가 벌써 40년이 넘는다. 하지만 어바인 시장이 된 지금도 내 영어는 완벽하지 못하다. 하면 할수록 어려움을 느낀다. 오랜 세월 미국인들과 부대끼며 살아온 나도 영어가 편치 않은데 나와 같은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영어 때문에 겪는 부담감이 오죽하랴 싶다. 2004년 시의원으로 당선되자 커뮤니티 행사에 초청을 받아 연설할 기회가 많아졌다. 2008년 시장으로 선출된 후로는 시의원 시절보다 연설 요청이 몇 배로 늘었다. 청중의 성격에 맞추어 이야기해야 하므로 분위기를 파악하는 기지가 필요하다. 연설하는 장소의 분위기에 따라 상당한 영향을 받기도 하고 무언가 편치 않은 상황에 직면할 때도 있다. 당황한 나머지 갑자기 머릿속이 엉키고 생각이 잘 안 날 때도 있다.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진땀을 빼면서 겨우 연설을 마치고 단상을 내려올 때도 있는데 그럴 경우엔 집으로 돌아오면서 '역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영어를 어렸을 때부터 익히지 않은 나 같은 사람에게 영어는 그저 외국어일 뿐이다. 영어 공부를 비교적 열심히 했고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나도 이렇게 영어에 쩔쩔매는 경우가 있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그러니 영어를 잘해야 하겠다는 강박관념부터 버릴 필요가 있다. 그런 강박관념이 영어를 더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사람들이 나를 보고 '한국에서 배운 영어치고 잘하는 편이네' 정도로 점수를 주면 마음이 편하겠는데 '강석희 영어는 미국 사람 뺨친다'고 하면 나는 점점 영어로 말하기가 불편해지는 것을 느낀다. 거듭 말하지만 나의 영어는 완벽하지 않다. 나는 다만 분위기에 맞는 주제를 찾아서 상대방과 동화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렇게 해야 상대방과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정작 영어를 말하는 데 자신 없어 하는 것도 영어를 잘할 것이라는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영어에 자신감을 갖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2009-10-27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29] 웅변대회 수상 휩쓸어 '영어 본색' 발동···대학가에서 영어 잘하는 학생으로 유명세

방학 동안 우리는 미국 공보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방학 때마다 영어 연극 대회가 열렸는데 우리는 이 대회를 위해 열심히 준비했다. 영어로 말하는 것도 힘든데 익숙지 않은 연기까지 해야 하니 준비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숫기가 없고 남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스스로 믿었던 내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냥 외워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작과 표정을 섞어서 연기하는 경험은 나를 또 다른 세계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연기도 곧잘 한다고 했다. 감춰진 끼 같은 것이 발동한 것일까. 무대에 한번 서보고 나니 점점 더 자신감이 생겼다. 무대 공포증도 없어졌다. 주위에서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더 신이 났다. 칭찬은 사람의 끼를 끌어내고 발산시키는 마력이 있는 것 같다. 어느 모로 보나 평범하고 수동적이었던 내가 클럽 활동을 통해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고나 할까. 나는 변화하는 내 자신이 신기했다. 영어에 푹 빠져 있는 동안 대학 생활 2년이 훌쩍 지나갔다.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입영통지서를 받고 나서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서예를 시작했다. 그때 시작한 서예가 지금까지 취미 생활의 한쪽을 차지하게 되었다. 지금도 묵향회라는 서예 동호회 모임에 참여하며 즐기고 있다. 나는 자랑스러운 육군 병장으로 34개월의 군복무를 마쳤다. 군단 본부에서 당번병을 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 시간이 많았다. 제대를 6개월 정도 앞두었을 즈음 영자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영어 본색'이 발동한 것이다. 1975년 9월 제대하고 복학하자마자 파인트리 클럽 멤버들이 모이는 곳을 찾았다. '더 그룹(The Group)'이라는 이름 아래 영국 대사관에서 모이고 있었다. 대학 초년 시절 알고 지냈던 선배들은 나를 보더니 무척 반가워했다. 당시 영국 대사관 3등 참사관이었던 워릭 모리스라는 사람이 우리 모임의 어드바이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영어 웅변대회 준비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모리스는 원고도 수정하고 발음도 잡아주면서 자상하게 지도해 주었다. 인구 문제를 주제로 코리아 헤럴드 웅변대회에 참가해 당당히 대학부 1등을 차지 국회의장상을 받았다. 학창 시절 내내 영어 외에는 별로 내세울 것이 없었던 나는 영어 웅변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면서 자신감이 더욱 충만해졌다. 내친김에 중앙대학교 주최 영어 웅변대회에도 나가 1등을 차지했다. 모교인 고대에서 개최한 대회에서도 1등을 했으나 타 대학에서 1등을 했기 때문에 자격이 없다고 해서 상을 반납하기도 했다. 각종 영어 웅변대회를 휩쓸자 서울의 대학가에서 영어에 좀 관심이 있다는 학생들 사이에서는 내 이름이 꽤 알려지게 되었다. 영어 스타가 된 나는 '파인트리'나 '더 그룹'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영어 공부를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자문을 구하는 친구도 많았다. 그래서 후배들을 모아 영어 공부 모임을 만들어 영어 웅변 테크닉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가르치면서 배운다고 정작 이런 활동을 통해 이득을 보는 사람은 나 자신이었다. 우리는 또 '굿 윌 데이Good Will Day'라고 해서 미군들과 정기적으로 만나 교류하는 모임도 가졌다. 미군들과 스스럼없이 대화하면서 영어 말하기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졌다. 돌이켜보면 파인트리 클럽에 가입해 영어와 깊은 인연을 맺었던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은 내 인생의 중요한 전환기였다. 영어를 통해 얻은 성취감 덕에 나는 무슨 일이든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는 자신감과 의지를 다질 수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별다른 포부가 없었던 내가 영어 공부를 계기로 꿈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막연한 '아메리칸 드림'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미국으로 훌쩍 떠나버린 형 그 형 때문에 나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동경심을 품어왔는지도 모른다.〈계속> 글= 올림출판사

2009-10-26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28] 다른 일에는 평범한데 영어는 항상 자신···대학 1학년때 영어회화 클럽 회장 맡아

중학 시절 나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영어 단어를 외우고 문장을 암기했다. 기억력이 좋아 암기에는 자신이 있었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와 단어 외우기 경쟁도 벌였다. 다른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놀라며 칭찬을 해주면 나는 더욱 신이 나서 영어에 매달렸다. 특출난 데가 없어서 아이들의 관심권 밖이었던 내가 영어 때문에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도 있구나' 하며 우쭐해 했다. 보성고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영어를 꽤 잘해서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과외를 같이 했던 예쁜 여학생이 있었다. 중학교에 진학한 후 오다가다 스치며 만났지만 부끄러워서 말 한 번 붙이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는 키도 훤칠하고 피부는 뽀얀 요샛말로 꽃미남 스타일인 데다가 팝송도 잘 부르니 여학생들이 많이 따랐지만 용기가 없어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이렇듯 나의 어린 시절은 지극히 평범했고 어찌 보면 샌님 스타일이었다. 다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강직함과 신의 책임감 같은 가치가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항상 넥타이에 양복 차림이셨던 아버지처럼 교복의 호크와 단추가 잠겨 있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모자는 늘 똑바로 쓰고 가방을 옆구리에 끼는 법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춘기 때 적당히 반항도 하고 일탈도 해보았더라면 싶은데 참으로 멋대가리 없는 시절을 보낸 것 같기도 하다. 이런 태도는 모두 아버지가 남긴 유전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 가지 일을 시작하면 흔들리지 않고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끈기와 뚝심도 아버지와 비슷하다. 어머니로부터는 하얀 피부와 여리고 정서적인 면을 물려받았다. 튀는 구석 없이 평범했던 내가 미국 대도시에서 한인 1세로는 처음으로 시장이 되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참 의외지만 이것은 미국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은 나같이 평범하더라도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길을 열어주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본받을 만한 나라다. 비범한 것이 없는 보통 사람이니 무엇이든 남들보다 두 배 열심히 한다는 각오로 오늘날까지 뛰었고 최선을 다하는 그런 태도가 '보통'을 넘어서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나도 몰랐던 나의 잠재력 고2 때 '파인트리'라는 영어회화 클럽에 가입했다. 5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는 클럽으로 유명 정치인 가운데 이곳을 거쳐 간 사람도 많다. 파인트리 클럽은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법과 시험 위주의 영어 공부에서 탈피해 회화를 집중적으로 연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미국에 오자마자 곧바로 취직할 수 있었고 그것이 결국 오늘날의 나를 만들어준 씨앗이 되었다. 회원들은 토요일마다 미국 공보원에 모여 영어로 대화하고 원서를 읽고 발표도 했다. 영어를 좋아하는 또래와 선배들이 한데 모이는 그 자리는 너무 즐거웠다. 웃고 즐기는 가운데 나의 영어 실력은 쑥쑥 자랐다. 대학생이 된 뒤 나는 더 열심히 클럽 활동에 매달렸다. 친구들과 어울려 막걸리 마시며 노는 데에는 취미가 없었다. 술을 못 마시는 데다 고려대 특유의 시끌벅적하고 호탕한 분위기가 나와는 별로 맞지 않았다. 친구와 선배들은 나를 보고 '연대 타입'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껑충한 키에 뽀얀 피부 깔끔한 외모가 전형적인 고대 스타일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대학 1학년 때 미국 공보원에서 17개 영어 클럽이 참가하는 영어 웅변대회가 열렸다. 나는 우리 클럽 대표로 참가해 3위를 했다.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내 모습을 눈여겨본 선배들이 나에게 회장을 맡으라고 했다. 반장 한 번 해보지 않은 내가 어떻게 클럽 회장을 할 수 있겠느냐며 거절했지만 선배들은 선.후배를 중간에서 아우를 수 있는 원만한 성격을 갖추었다면서 나를 부추겼다. 그 바람에 보통 2 3학년이 회장을 맡던 관례를 깨고 1학년생인 내가 회장을 맡게 되었다.〈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09-10-22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27] 평범하고 내성적으로만 기억했던 동창들…시장 당선후 "재가 그때 강석희야" 놀라

지금은 실력이 많이 녹슬었지만 가끔은 어렸을 때 배웠던 바이올린을 켜며 기분 전환을 하기도 한다. 언젠가 한인 신문사에서 '명사들의 취미 생활'이라는 코너를 위해 취재를 하겠다면서 나에게 바이올린 켜는 포즈를 잡아달라고 했다. 어색하게 바이올린을 켜는 민망한 모습이 신문에 등장했는데 고백하자면 나의 바이올린 실력은 고등학교 시절 이후 나아진 게 없다. 다만 바쁜 생활 속에서 잠시라도 여유를 찾고 싶을 때 그때 쓰던 바이올린을 가끔 어깨에 올리곤 한다. 어릴 때부터 나는 감수성이 예민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어느 날 과외 공부를 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집 앞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불에 싸인 갓난아기가 바로 내 방 앞에서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매섭게 추운 겨울밤이었다. 나는 어머니께 뛰어가 집 앞에 아기가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발을 동동 굴렀다. 어머니는 누가 아기를 버리고 간 것 같다고 하셨다. 영문을 몰랐던 나는 아기가 너무 불쌍하니 우리가 키우자고 졸랐다. 하지만 어머니는 파출소에 신고한 다음 아기를 경찰에 데려다 주셨다. 사실 지금도 가끔 그 아기가 지금 어떻게 됐을까 하고 생각날 때가 있다. 아무튼 나는 집에서 애지중지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기는 했지만 불쌍한 사람을 보면 남다른 동정심을 보이며 가슴 아파했다. 누가 장래 희망을 물어보면 사회사업가나 고아원 원장이 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너는 잘돼 봐야 학교 선생밖에 못 하겠다 어린 시절 나는 순하고 내성적인 편이었다. 나서는 편도 아니었고 화제를 이끌어가는 타입도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다른 친구들 속에 묻혀 지냈다. 그래서인지 어린 시절의 나를 기억하는 친구들이 별로 없는 편이다. 나는 그렇게 평범한 아이였다. 어바인 시장에 당선되고 난 얼마 후 KBS에서 나의 생활을 다큐멘터리로 방영한 일이 있었다. 방송이 나가고 며칠 후 최용성이라는 초등학교 동창에게서 이메일이 왔다. 목욕탕 집 아들로 항상 우등생이었던 친구인데 40여 년 만에 연락이 닿은 것이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교수로 있다고 했다. 너무도 반가워서 바로 한국으로 전화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어릴 때 그렇게 조용하고 샌님 같았던 내가 미국의 대도시에서 치열한 선거를 거쳐 시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믿을 수가 없었노라며 놀라워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도 내가 정치인이 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하나같이 "어바인 시장이 그때 그 강석희야?" 하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들께는 죄송한 표현이지만 아버지는 대장부다운 모습이 없었던 나에게 "너는 잘돼 봐야 학교 선생밖에 못 하겠다" 하시며 자주 실망감을 내비치셨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도 있구나 서울사대부중 시험에 낙방한 나는 혜화동에 있는 동성중학교에 입학했다. 보이스카우트에도 가입해 활동했고 막 창설한 야구반에도 들어가 우익수를 맡았다. 서울시 야구 대회에서 경동중학교에 무참하게 졌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저명한 시인이셨던 황금찬 선생님과 박희진 선생님에게서 작문과 영어를 배웠다. 나는 처음 배우는 영어에 특별한 호기심을 가졌다. 공부를 아주 잘하는 축에 들지 못했던 나는 영어에서만큼은 특출한 재능을 보였다. 아마도 기억력이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09-10-21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26] 어머니가 10년 반찬값 아껴서 주신 1만불, 이민생활 힘들때마다 꺼내보고 용기 얻어

-가족 위해 평생을 바치신 어머니 어머니는 평생 손에서 걸레를 놓지 않으신 분이다.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머니는 항상 무언가를 닦고 있는 모습이다. 그만큼 정갈하고 깔끔하셨다. 어머니가 해주신 개성 특유의 담백하고 깊은 음식 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성품이 온순하셔서 평생 단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이거나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한없는 사랑을 베푸신 헌신적인 분이셨다. 어머니는 혼자였던 시누인 고모를 끝까지 돌보셨다. 고모가 5년 넘게 치매를 앓을 때도 변함없이 묵묵히 돌보셨다. 여느 시누이와 올케 관계를 생각할 때 참 대단한 정성이셨다. 어머니는 올케인 외숙모와도 수십 년 동안 한 집에서 살 정도로 참을성이 많으셨다. 어머니라고 왜 불평불만이 없었을까마는 평생 자신의 삶을 숙명처럼 여기며 자신을 버리고 가족을 위해 희생만 하며 살다가 간 수많은 대한민국 어머니 중의 한 분이셨다. 1980년대 초 미국 이민 생활 초창기에 잠시 한국에 다니러 온 적이 있었다. 아내가 아이들 때문에 직장에 나가지 못해 나 혼자 버는 돈으로 힘들게 살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어머니가 나를 조용히 방으로 부르시더니 봉투를 하나 건네셨다. "석희야 이거 받아라." "그게 뭐예요 어머니?" "애들 둘 키우면서 힘들게 사는데 내가 돈 좀 줄게." "돈요? 저희 필요 없습니다. 그냥 어머니 용돈 쓰세요." "너희들 주려고 내가 그동안 모은 거다. 어서 받거라."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시면서 봉투를 얼른 내 주머니에 넣어주셨다. 1만 달러 정도 되는 큰돈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로서는 정말 큰돈이었다. 어디서 난 돈이냐고 여쭈었더니 지난 10년 동안 아버지에게서 받은 생활비로 시장을 본 다음에 남은 돈에서 조금씩 떼어 적금을 들었노라고 하셨다. 어머니가 건네주신 봉투를 받아드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멀리 떠나 있는 자식을 위해 10년간 반찬 값을 아끼고 적금을 부어 모은 돈을 생활비에 보태 쓰라고 주시는 그 마음을 헤아리니 가슴이 쩌릿해 왔다. 미국으로 돌아와서도 한동안 그 돈을 쓸 수가 없었다. 얼마나 귀중한 돈인가. 나는 이민 생활이 힘들어질 때마다 그 돈을 꺼내 보았고 그때마다 어머니의 한없이 큰 사랑을 생각하며 다시 힘을 내곤 했다. -고아원 원장이 꿈이었던 아이 나는 휴전 직후인 1953년 9월 서울 종로구 예지동에서 태어났다. 원래 9남매 중 일곱째였는데 내 위로 누나 셋은 어릴 때 세상을 떴다고 했다. 딸을 연이어 넷이나 낳은 다음에 얻은 아들이 나였다. 내가 어릴 적 부모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은 데는 이런 까닭이 있었다. 우리 집은 그럭저럭 사는 편이었다. 그 당시 집에 제니스 TV 전축 세트 전화도 있었다. 아버지가 포목점을 하시면서 돈을 꽤 버셨던 모양이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의 손에 끌려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바이올린 같은 과외 활동이 흔치 않았다. 내가 다닌 효제초등학교에는 합주단이 있었다. 거기서 개인 교습도 받았다. 바이올린 레슨은 10여 년간 계속되었다. 아버지의 반대로 무산되기는 했지만 음대에 진학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아버지는 음대 가면 굶어죽기 십상이라며 극구 말렸다.

2009-10-20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25] 개성상인 출신 아버지 40년간 포목점 '한길' 평생 신용 최고덕목 강조…정치 밑거름 돼

◇ 제2장 대한민국 나의 조국 -개성상인의 둘째 아들 나는 못 말리는 '강씨 고집'으로 유명한 진주 강씨이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부모님 두 분은 모두 개성 토박이다. 아버지는 3살 때 부친을 여의고 일찍부터 가장 역할을 하느라 초등학교만 마친 후 집 앞에 좌판을 깔고 물건을 팔면서 장사를 배우셨다. 정미소에서 품팔이 일꾼도 하셨다. 어린 시절부터 개성상인의 상도를 배우신 것이다. 아버지에게서 전쟁 중 북한군에 끌려갔다가 도망친 이야기 죽음을 피해 월남했다는 사연을 들은 기억이 어렴풋하게 난다. 월남한 아버지는 청계천 다리 근처에서 노점 포목상을 하다가 서울 광장시장으로 자리를 옮겨 한자리에서 40여 년간 포목점을 하셨다. 가게 이름은 '특일상회'였다. 수백 개의 가게 중 번호가 특1호였기 때문이다. '특일상회 강 사장'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특히 신용이 철저한 상인으로 유명했다. 아버지는 얼마든지 외상으로 물건을 살 수 있었고 아버지가 쓰는 당좌수표는 시장과 은행에서는 보증수표로 통했다. -석희야 첫째도 신용 둘째도 신용이다 "신용을 지켜라. 사람과의 신의가 가장 중요하다. 신용이 없는 사람과는 사귀지 말아라. 첫째도 신용 둘째도 신용이다."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에게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신용을 강조하셨다. 어릴 때는 잘 몰랐지만 지나고 나서 나는 장사를 하는 아버지에게 신용은 생명과도 같은 중요한 덕목이었고 자식들이 평생 동안 지켜 나가야 할 가훈이라는 사실을 깨우치게 되었다. 아버지는 흐트러짐이 없는 분이셨다. 오직 한길만을 우직하게 걸어가셨다. 다른 사람들이 포목점에서 번 돈으로 점포를 확장하거나 더 유망한 다른 업종으로 바꾸는 것을 보면서도 아버지는 한 번도 곁눈질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장사를 하시던 그 자리는 지금은 외가 친척이 지키고 있다.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보면 정장을 하신 모습만 떠오른다. 항상 넥타이를 맨 양복 차림이셨다. 집에서도 양복을 입은 모습을 더 자주 보았다. 1980년대 중반쯤 미국 이민 초기에 부모님을 초청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때도 넥타이에 양복 차림이셨다. 심지어 디즈니랜드에 갈 때도 똑같은 차림을 하셨다. 그날 디즈니랜드 관광객 중에 넥타이를 맨 사람은 아마도 아버지가 유일하지 않았을까 싶다. 날씨가 더우니 넥타이도 풀고 윗도리도 벗으시라고 말씀드렸건만 사람이 많은 곳일수록 예의를 지키고 단정하게 보여야 한다며 굳이 정장 차림을 고수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버지의 고집은 아무도 꺾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이렇듯 매사에 강직하고 한 우물을 파는 그런 분이셨다. 신용을 생명같이 여기고 옳다고 믿는 일은 뚝심을 갖고 저돌적으로 실천하는 분이셨다. 나는 정치인은 신용을 파는 사업가라고 생각한다. 정치란 결국 자신을 파는 일이다. 정치인이 유권자와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신의를 지킬 때 정치인은 비로소 진정한 지도자로서 국민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신용을 중시하는 아버지를 보고 배운 때문이 아닌가 싶다.〈계속〉 글.사진=올림출판사

2009-10-19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24] 시장선거에선 젊은층 공략으로 당선···주류언론도 '어바인의 오바마' 축하

시장 선거 때는 자원봉사자들이 더욱 많아졌다. 백인을 포함하여 여러 커뮤니티에서 많은 자원봉사자가 기꺼이 시간을 내서 나를 도와주었다. 종반전으로 갈수록 자신감이 붙었다. 여론조사 추이도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2008년 1월 지지도 조사에서는 내가 공화당의 셰이 후보에게 10%나 뒤지는 것으로 나왔으나 8월에는 격차가 2%로 줄고 10월 중순에는 내가 5% 정도 역전한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에 대한 지지세는 더욱 탄력을 받았다. 마침 버락 오바마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젊은이들 사이에 참여 분위기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을 때였다. 나도 젊은이들의 표를 겨냥했다. UC어바인 캠퍼스에 거의 상주하다시피 하며 젊은 학생들의 표심을 공략했다. 전략은 적중했다. '수키 캥'이란 이름이 입에서 입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알려지게 되었다. 그 결과 UC어바인에서 거의 80%에 가까운 지지를 받았다. 11월 4일에 실시된 선거에서 나는 3만8505표를 받아 3024표 차이 52%대 48%로 백전노장 크리스티나 셰이 후보를 물리치고 정치 입문 4년 만에 어바인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한인 이민 1세로서 미국에서 첫 번째 직선 시장이 된 것이다. LA타임스를 비롯한 주류 언론들은 나의 당선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한국 언론들도 오바마 대통령 당선과 함께 나의 시장 당선을 아울러 보도하면서 나에게 '어바인의 오바마'라는 별명을 지어주며 이민 1세의 기적 같은 성공 스토리라고 평가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내 생애에 일어났을까?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24살에 이민 온 내가 31년 만에 미국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 최상의 교육 도시 어바인의 시장이 되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계란으로 바위를 쳐서 깬 셈이라고나 할까.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 이민 1세 강석희의 미국 시장 당선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흑인 오바마와 이민 1세 강석희를 선택한 미국인들의 포용력 모든 이에게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미국의 열린 정신에 고마움을 느낀다. 한국에서 방글라데시나 필리핀 출신 이민자가 선출직에 출마한다면 한국인들이 과연 그들을 시장이나 의원으로 뽑아줄지를 생각해 보면 미국 사회의 열린 태도는 더욱 돋보인다고 하겠다. 나는 시장에 취임하자마자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했다. 상대편에 대한 비난을 삼가고 인격적으로 존중했다. 필요할 때는 이해를 구했다. 시장 선거에서 최대의 라이벌 관계였던 크리스티나 셰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그녀는 "수키 당신이 시장이 되어서 기쁩니다. 적수였던 나에게도 존경심을 보여주어서 고맙습니다" 하고 말했다. 시의원들과 공무원들은 이전 시장한테는 이름을 부르며 편하게 대했지만 나에게는 꼭 "시장님(Mr. Mayor)"이라고 부르며 존경심을 나타낸다. 이런 일에서 나는 상대방을 존경해 주면 그만큼 내가 높임을 받는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나는 매주 수요일 아침에 '시장과의 대화'(Meet the Mayor) 시간을 가지면서 주민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고 있다. 민심과 여론을 읽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주민들의 애환을 파악하여 즉각 관계 직원에게 지시하고 해결해 주는 열린 시정에 크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역사가 기억하는 훌륭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나도 어바인이 배출한 가장 훌륭한 시장이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리라 다짐한다. 그것이 나를 뽑아준 주민들의 뜻에 부응하는 길이며 동시에 아직 끝나지 않은 나의 새로운 도전을 가능하게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2009-10-15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23] 한인들 교육기금 20만달러 내놓자 지역사회서 한인 보는 눈도 달라져

나는 즉각 시의회에 긴급 협동 기금 100만 달러를 교육구를 위해 기부하자는 내용의 안건을 제출했다. 커뮤니티에서 기금을 모으면 같은 액수를 시정부가 보태 교육구의 예산을 지원해 주는 매칭펀드기금을 모은 액수만큼 지원해 주는 방식를 제안한 것이다. 결국 매칭펀드로 교육구 예산을 도와주자는 안건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나는 한인사회를 상대로 기금 모금에 나섰다. 어바인 한인 학부모회를 포함해 한인 교회 한인 기업체 대표들을 만나 지원을 당부했다. 특히 기업체들에 대해서는 사회에서 버는 돈의 일부를 2세 교육을 위해 환원해 달라고 호소하면서 동참을 촉구했다. 그 결과 한인 커뮤니티에서 가장 먼저 20만 달러가 모였다. 어바인 시에서 그 액수만큼의 매칭펀드를 내놓았으므로 교육구는 한인사회의 노력으로 40만 달러의 예산을 늘리게 되었다. 한인사회에서 먼저 바람을 잡자 다른 커뮤니티와 단체들도 잇따라 모금에 동참했다. 교육구에서 한인 커뮤니티에 특별히 감사를 표하게 된 데서도 알 수 있지만 교육 기금 모금은 지역사회에서 한인사회를 다시 보게 한 계기가 되었다. 2008년 시장 선거에서도 가가호호 방문은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발바리 캠페인'은 이제 나의 트레이드 마크로 굳어졌다. 2006년 시의원 재선 때도 1만 가구를 돌았는데 이번에도 그 정도는 돌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2008년 8월부터 본격적인 도보 캠페인에 나섰다. 이번에는 두 번의 선거를 치르면서 한 번도 가지 않았던 우드브리지 지역을 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보수적인 노인들이 많아 여태껏 민주당이 이긴 적이 없기 때문에 대충 포기하는 곳이었다. 선거 때마다 6대 4 또는 7대 3 정도로 민주당이 항상 지곤 했다. 그 지역에 공을 들이느니 차라리 부동층을 더 끌어당기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에서 거의 외면해 왔던 것이다. 나는 우드브리지 지역을 다 훑기로 마음먹었다. 면전에서 구박당하는 일도 많으리라 짐작하며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반응이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문전박대하는 집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작 만나보니 의외로 우호적이었다. "시의원 활동을 지켜봤는데 잘하더라" "유심히 봤는데 논리도 정연하고 화합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더라"는 칭찬도 받았다. 우드브리지 지역을 돌면서 나는 많은 것을 느꼈다. 선입견 때문에 시도해 보지도 않고 망설이고 주저했던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는 반성과 함께 도전 정신과 자신감도 갖게 되었다. 내 생각이 결코 완벽할 수 없다는 것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 해보기도 전에 못한다는 가정은 금물이라는 것 하다가 포기하게 되더라도 일단은 실천해 보자는 것 우드브리지 캠페인은 나에게 이런 교훈을 주었다. 그리고 이 경험은 나를 주민들 앞에서 더욱 겸손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09-10-14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22] "재선 당선 무난 보도하면 한인투표 준다" 한인 언론에 '안심 못해' 써달라고 당부

한인사회나 언론에서도 나의 재선은 무난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나 자신도 재선은 자신 있었다. 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나름대로 내세울 만한 업적을 많이 쌓아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왕이면 크리스티나 셰이를 꺾고 1위로 당선되고 싶었다. 어차피 2년 후에 시장 출마를 염두에 두고 있었고 강력한 라이벌인 셰이 후보를 이번 선거에서 꺾으면 시장 선거에서 훨씬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1위와 2위의 표 차는 단 몇 백 표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한인사회에서는 '이번에 강석희 당선은 무난하다'는 분위기였다. 2년 전 첫 도전 때는 한인 언론들이 '될까' 하는 물음표를 던졌지만 이번에는 '당연히 된다'라고 쓰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1위 당선을 바라는 나는 한 표가 급하고 마음이 초조했다. 나에게 한인 표는 절대적인 지지 기반이었기 때문에 한인 한 명이 투표를 하면 내가 한 표를 더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랬기 때문에 한인들이 한 명이라도 더 투표장에 나와주기를 바랐다. '당선 무난'이라고 기사를 쓰는 한인 언론에 대해서는 '제발 그렇게 쓰지 말아 달라 그러면 한인들이 투표를 안 한다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써 달라'는 당부까지 했다. 2006년 11월 7일 선거일이 되었다. 8시에 투표를 마감하고 자정쯤 되어 선거 결과의 윤곽이 드러났다. 셰이 후보에 200여 표 못 미치는 2위 당선이었다. 아쉬움이 컸다. 2004년 내가 처음 출마했을 때 한인 유권자 투표수는 1650표. 그러나 이번에는 불과 600표 남짓이었다. 그만큼 한인 투표율이 낮았다. '강석희는 당연히 되겠지' 하면서 투표장에 나오지 않은 한인 유권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한인들이 300명만 더 투표장에 나와서 표를 몰아주었다면 목표로 했던 1위 당선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 팀이 상하이 자매결연 건으로 아시아계 표를 분산시켜 내가 상당수의 표를 잃은 데다 시장까지 지낸 14년 정치 경력의 셰이 후보와 맞서 200표 차이로 2등을 했다는 것은 사실상의 승리나 다름없다고 자위했다. 언론에서도 근소한 차이로 2위 당선한 나의 잠재력에 비중을 실어 다루어주었다. 당선 후 기자회견에서 나는 속마음을 내비치고 말았다. 2년 후 시장 선거 출마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조금 성급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시의원 재선과 함께 시장 선거를 위한 2년의 레이스가 다시 시작되었다. 재선 시의원이 된 이듬해인 2008년 주정부의 재정 적자가 심각해지면서 교육구의 예산이 1250만 달러나 대폭 삭감되었다. 꾸준히 투자를 늘려 학급 규모를 줄이고 교육의 질을 높이고자 했던 교육구의 방침에 차질이 불가피했다. 교사 감원으로 인해 학급당 학생 수가 늘어 콩나물시루 교실이 될 위기에 처한 학교들도 생겨났다.〈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09-10-13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21] 학생 관련 모임엔 어디든 달려가 관심

2006년 재선은 나의 정치적 미래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선거였다. 베스 크롬 시장이 재선에 성공하면 2년 후에는 3연임 금지조항으로 임기가 끝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내가 시의원 재선에 성공하면 2008년 시장직에 도전할 때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2006년 선거에서는 첫 선거 때보다 나를 지원해 주는 자원봉사자들이 늘어났다. 백인 자원봉사자가 많이 늘어난 것도 나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사실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동양인들만 대동할 경우 자칫 아시아계만을 대표한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학생 관련 모임엔 어디든 달려가 관심 "수키 캥은 어디가도 있다" 소문 퍼져 커뮤니티 행사에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특히 교육 문제에 관심이 많았기에 학생들의 건강.교육.안전 문제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였다. 경찰서와 학교가 연합해서 실시하는 '약물 남용 방지 교육 프로그램(DARE Drug Abuse Resistance Education)' 수료식에도 참석해서 교육을 받은 청소년과 부모들을 격려했다. 이렇듯 학생들이 있는 자리라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관심과 애정을 보이자 그들이 나의 훌륭한 전도사가 되어주었다. 학생들은 집에 가서 부모에게 "오늘 수키 캥이 와서 좋은 이야기를 해주고 갔어요"라며 나의 캠페인을 간접적으로 도와주었다. 우연히 나를 만난 학부모들은 아이들한테 이야기를 들었다며 좋은 일에 앞장서줘서 고맙다고 인사하곤 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어바인 주민들 사이에서 "He's everywhere(수키 캥은 어딜 가도 있다)"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어바인 시는 백인 아시아계 중동계 등 각 민족별로 다양한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다. 이 때문에 다문화 커뮤니티의 화합과 협력은 시정부가 관심을 두어야 하는 중요한 이슈였다. 나는 다문화 민족 간의 대화와 화합을 이끌어내기 위해 유대계와 이슬람계 사이에 대화 창구를 마련하는 등 무던히 노력을 기울였다. 주류 언론들은 공화당의 노련한 여성 정치인인 크리스티나 셰이와 내가 선두 다툼을 벌일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셰이 의원은 시의원 10년 시장 4년을 합해 14년이나 어바인에서 잔뼈가 굵은 노련한 정치인이다. 그리고 백인이다. 거기에 비해 나는 어바인의 정치 무대에 선 지 2년밖에 안 된 신인이니 객관적으로는 비교가 안 되는 상대였다. 그렇지만 나는 발로 뛰면서 주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대중 정치인으로 각인이 되고 있어서 나와 셰이 의원의 각축은 그 귀추가 주목되는 한판 승부였다. 〈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09-10-12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20] 상하이와 자매결연에 대만계 주민 원성···2006 시장 재선 앞두고 또 다시 위기

2006년 재선 여부가 걸린 선거를 앞두고 또 한 차례 위기가 찾아왔다. 어바인에는 대만계 홍콩계 대륙계 등 다양한 중국계 이민자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중국계 커뮤니티라는 큰 범주 안에서는 하나가 되지만 일상에서는 서로 다른 민족처럼 따로따로 어울리는 독특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대만계와 중국 본토에서 온 이민자들은 정치적인 배경 때문에 서로 미묘한 대립 관계를 형성하곤 했다. 한번은 상하이 시에서 어바인에 자매결연을 요청해 왔다. 나는 준비위를 발족시켜 1년 반 이상 준비를 하고 차근차근 계획을 세웠다. 준비가 끝난 뒤 시장과 몇몇 시의원 그리고 자매도시 위원회 임원들과 함께 2006년 6월 상하이를 방문했다. 우리는 상하이 측과 자매도시를 맺는다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온 지 1주일 정도 지났을 때 'OC 레지스터'에 대문짝만한 기사가 나왔다. 시장 일행이 상하이에서 자매결연을 맺으면서 부당한 조항에 서명을 했다는 것이다. 즉 중국 측이 작성해 제시한 양해각서 조항에 '하나의 중국' 원칙에 의거해 중국의 도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어바인의 지도자들은 대만을 공식적으로 여행하지 못하며 대만 국기를 공식 행사에 게양하지도 못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거였다. 베스 크롬 시장은 이런 조항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당시 한 실무자가 실수로 서명을 했기 때문이었다. 어바인 방문단이 이런 내용의 자매도시 결연 합의문에 서명했다고 보도가 되었으니 어바인의 대만계 이민자들이 들고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공화당 쪽에서도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대만계 이민자들이 모여 살고 있는 LA 인근 몬터레이 파크 지역 주민들은 단체로 버스를 빌려 타고 어바인에 몰려와 시의회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오랜 시간 발로 뛰면서 많은 중국계 인사들을 내 편으로 만들었고 자매도시 결연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대만의 타오위안 시를 방문하기도 했건만 자칫 그동안 쌓아온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게 될 처참한 상황이었다. 재선을 위한 선거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짙은 먹구름이 낀 것이다. 대만계 주민들이 등을 돌리니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암담하기만 했다. 나는 대만계 지도자들과 주민들을 일일이 만나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고 이번 사건은 순전히 오해에서 빚어진 일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이 사건은 상하이와 맺었던 자매도시 협약을 파기하고서야 가라앉았다.〈계속> 글=올림 출판사

2009-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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